부지런한 허송세월
2020년 3월 8일 본문
20년 3월 8일의 하루.
아침 8시 10분 즈음에 일어났다. 꾸러미에서 와서 남은 냉이와 어제 한살림에서 사온 두부 반모, 이모가 담근 된장 풀어서 끓였다. 생선이 먹고싶어지던 어제, 몇달 전 엄마가 챙겨주어 냉동실에 넣어놨던 조기가 퍼뜩 생각났다. 냄새 감당이 어려운 굽기는 그만하고 한번 쪄보자고 검색해보니 조기찜이 의외로 쉽다. 다만 '맛술'이나 '청주'가 꼭 있어야 한다는건데..... 이미 어제 한살림에 다녀온지라 아침을 먹고 초록마을로 향했다. 가다가 집 근처 마트에 가서 맛술을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슨 '영양강화제'니 어쩌고니와 외국산 쌀이 구성성분이다.
초록마을은 11시부터 연다길래 산길로 조금 고불고불 돌아가고 은평구에서 제일 오래된 아파트라는 미성아파트 지나, 불광문고에 가서 잠시 책 좀 봤다. 그러고 50분 즈음 넘어 초록마을까지 갔는데 웬걸 열질 않았다. 건너편에 있는 신협에 가면 만화책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가려고 했더니 일요일이라 열질 않았다. 다시 초록마을로 건너갔더니 아주머니와 할머니 한분이 나처럼 왜 안여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여기 옆에 지금 마스크 팔아, 가서 마스크 사" 라는 첨언까지 해주시는 분과 한참을 기다리니 10분이 넘어서 직원분이 헐레벌떡 와서 문을 열었다. 맛술과 함께 50퍼센트 할인인 메밀묵까지 잡아서 따릉이 타고 독바위역으로 컴백.
잠깐 쉬면서 책 조금 보다가 급 배고파져서 현미후레이크 남은 거 주워먹었더니 더 배가 고파져서 급하게 조기찜 준비. 인터넷 보고 그대로 간장, 맛술, 참기름, 물과 조기를 넣었다. 얼마전 꾸러미로 왔던 삶은 고구마줄거리도 냉동실에 넣어놨는데 같이 찌면 안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구마줄거리 조기찜 검색해보니 누가 했다. 안심하고 한다. 누가 한지 안한지 확인하고 요리를 한다. 좀 용기가 없다. 하여튼 고구마줄거리는 다진마늘, 간장, 맛술, 들기름 넣어서 조물거린다음 생선 바닥에 깔으라는데 왠지 생선이 안익을 것만 같아서 생선 위를 덮어버렸다. 그렇게 10여분 끓이고 젓가락으로 들춰보니 대충 익은듯 싶었다. 어제 한살림에서 사온 브로콜리도 씻어서 잘라서 데쳐놓고. 점심식사.
점심점심 먹고 나서 밖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너무 따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원래도 주말엔 등산객들이 북적거리는 동네라지만 평일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합쳐도 이보다는 많을 정도였다. 6개월을 살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봤다. 안그래도 코로나 이후로 한적하던 산책길과 산길에 사람이 많아졌다. 개학 안한 애들과 재택근무하거나 쉬는 어른들이 사람많은 도심이나 쇼핑몰 가는 대신 이쪽으로 다 빠진듯 싶다. 그런 면에선 전염병이 여러사람을 해방시켰다.
요 며칠 머리가 복잡했다. 급작스레 취직의 기회가 찾아왔고 뽑아준다는건 아니였지만 이력서를 넣을까 말까 하루에도 열두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본가 근처에 갔더니 리치몬드에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제과제빵 정규반 현수막을 보고 또 마음이 일렁였다. 이건 수강료가 비싸지 않은데 주5일 11개월이나 배우는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다니겠다면 정말 완전히 전업을 하겠다는 건데, 그마만큼 빵을 좋아하나? 좋은 재료를 쓰지 않는 일반 베이킹을 일년을 쏟아부어 배울만한건가? 그걸 배울만한 의지와 깜냥이 되나?
취직은 취직대로 고민이었다. 주 5일 9-6시까지 내 시간을 모두 다른 곳에 할애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내가 하고싶은 일인가? 이 일을 시작하면 언제까지 할것인가? 올해 가을에 가려고 하던 유럽여행은 갈 수 있나? 유럽여행을 가긴 갈껀가? 도대체 유럽이 뭐길래??? 그러면 지역에는 언제 내려갈건데? 이 월세방은 언제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고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니 속이 갑갑했다. 이 와중에 베이킹 학원은 코로나 때문에 무려 3주를 휴강하니 더 답답했다. 스물 아홉에 할줄아는게 없는 애 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힐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하고 살아왔다.
하여튼 산책을 나간 호숫가에 앉아서, 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하자고 생각했다. 딱 1년을 불광동에서 살 생각이었고 9월 즈음에 유럽여행을 가자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고 나온 독립길.....이었다. 일반적인 재료를 쓰는 베이킹을 1년간 배울만한 마음도 없다. 당장의 베이킹 학원을 마저 다니고, 돈이 오히려 좀 더 들더라도 짧은 구움과자 과정과 쌀베이킹, 비건베이킹 쪽으로 배워야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