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허송세월
더덕까기, 노동 본문
더덕까기
배달음식이 진을 치는 요즘, 우습게도 집에서 밥을 해먹는 것도 훨씬 쉬워졌다. 갖은 재료가 모두 손질되어 꺼내어 냄비에 모두 끓이기만 하면 되는 '요리 키트(KIT)'가 유행한다. 껍질이 벗겨진 감자가 진공포장되어 마트에 있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한 나로서는 키트 역시 낯설다.
집에서 밥을 해먹는다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포함된다. 말마따나 쌀을 씻고 밥을 안치는 것, 갖은 양념을 넣고 요리를 하는 것, 육수 또는 채수를 끓이는 것, 뭔가를 굽거나 부치는 것 등등. 요리 키트가 유행하는 건, 이 중 제일 '버겁게' 느껴지는 재료를 다듬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일테다. 껍질을 벗기고 물에 씻어 헹구고, 씨를 발라내고 어쩌고 저쩌고를 모두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얼마나 간편한가.
본가에 살때 요리광인 엄마로 인해 재료를 다듬어야 할 일이 부지기수였다. 손이 매워지도록 마늘을 까고 쪽파 껍질을 벗겼다. 멸치 똥을 따고, 고구마 줄기를 죽죽 벗기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난데없이 찾아오는 이 일이 괴로웠다. 작은 일이라도 예고가 필요한 나로서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허리아프고 무릎아프고 손에 냄새나면서 인고의 시간을 갑자기 버텨야만 하는 것이 납득하기 쉽지않았다. 물론 생각해보면 웃긴일이다. "내일 오후 3시 쯤에 고구마 줄기를 벗기는 것에 동참해줄 수 있겠니?" 라고 묻는 집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냔 말이다.
아무튼 나는 종종 그 일을 피했고, '하기싫으면 하지 말아라' 라고 쿨하게 말하는 엄마에게 남은 죄책감 때문에 왜 가게에서도 계속 손쓰는 일하고 와서도 그걸 하냐고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가벼이 넘겼다. "티비보면서 하면 금방하는데 왜." 맞다. 기본적으로 손을 잘쓰고 요리도 빨리하는 엄마에게 재료손질은 티비보면서 남는 손을 움직이는 별거 아닌 일이었다. 반면 둔해서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어딘가 서투른 내게는 정말 큰 일이었고.
지난 주말 본가에서 시간을 보낼 때에도 그랬다. 엄마가 작년에 주워놓은 껍데기에 쌓인 단단한 은행들을 까는데, 정말이지 같이 앉아 까고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바에 안먹고 말겠다는 싸가지없는 결심까지 하며 난 하지 않겠다, 고 선언했고 여느때처럼 엄마는 그러던가~ 하며 망치로 쾅쾅대며 은행을 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게 은행 한 줌을 싸주며 꼭 밥에 넣어먹던지 구워먹던지 보양식이니 먹으라며 단디 챙겨주었다.
은행을 넣고 가마솥에 밥을 앉쳐 먹으니, 맛있었다. 가을 나무의 힘을 내가 다 뺏어먹는 듯한 기분? 봄철 두릅을 먹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한달 전 쯤 엄마와 서울시 농부의 사장에서 샀던 더덕을 이제야 까기 시작했다. 집에서 까보긴 했으나 꽤 오래전 일이었고 너무 귀찮아서 도저히 깔 맘이 들지 않아서 미루고 미뤄온 더덕. 칫솔질하며 세네번쯤 씻어 헹구고, 끓는 물에 데쳤다. 찬물에 바로 식히고 칼로 벗기기. 한 3분쯤 데쳤더니 좀 익어서 손으로도 잘만 까졌다. 껍질에 붙어나오는 더덕살을 그냥 쌩으로 먹으니 아, 이런 맛이. 모처럼 맛보는 더덕의 향과 맛. 다 깐건 손으로 죽죽 찢어서 들기름에 살짝 구웠다. 어떤 양념을 안해도, 소금 하나 안뿌려도 맛있었다.
따지고 보면 재료를 손질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앉아서 하다보면, 그냥 하게 된다. 라디오나 음악 틀어놓고 하다보면 잡념을 지우고 몰두할 수 있다. 손으로 하는 일들이 얼마 되지 않는, 그래서 뭔가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가 성행하는 요즘에 오히려 딱일듯 싶다. 갓 손질한 재료를 맛보면 그 힘듬도 잊게 되고.
게다가 손질된 재료를 볼 때마다 도대체 저걸 누가 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한동안 본가에서도 다 까놓은 마늘을 사다 먹었는데 너무 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 대신 누군가가 이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마늘을 깠다는 생각을 하면 도통 이해가 안갔다. 절임배추나 굴을 볼때도 마찬가지. 직접 그 노동을 하는 사람을, 장면을 <극한직업> 같은데서 마주할때면 죄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물론 손질한 만큼 더 가격이 붙고 그 노동으로 생계를 잇기도 하고 내가 정당하게 돈을 지불한거고, 그걸 시장에 팔고 있으니 이렇게 보자면 멀쩡한 거래일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당번을 정해 화장실 청소를 나누어 하는 사무실에선 화장실 청소를 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듯, 각자가 각자의 몫만큼의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한다면 주구장창 마늘을 까야하거나 배추를 절여야만 하는 '노동에 매몰된' 노동자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쓰레기를 제대로 분리수거하지 않으면서 '이래야 분리수거 하는 사람들이 먹고살지, 안그러면 그사람들 할일없어' 라고 말하는 건 이타적인 자본주의자의 모습일까? 그저 한사람이라도 더 자기가 원하는 노동, 조금이라도 더 자율적일 수 있는 노동이 많아지려면 모두가 그 몫을 조금씩 분담하면 되지 않을까. 누군가는 누군가의 뒤치닥거리를 해주는 노동만을 한다는 건 뒤치닥거리를 하는 사람에게도, 뒤치닥거리를 받는 사람에게도 결코 인간적일 수 없는 모습일테다.
더덕 까다가 별 생각을 다했다. 그림자 노동과 노동의 전가 어쩌고까지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밤이 늦어 글을 줄여야겠다. 아무튼 나와 살면서 보다 재료 손질에 겁없이 덤비게 되었다. 호박씨 까는게 제일 어려웠는데, 다음엔 뭘 도전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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