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허송세월
독바위 집, 최초로 고기 구워먹은 날 본문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떡 수업에서 들은 '상추떡'(흰 팥앙금, 거피팥을 이용한 시루떡인데 상추가 들어감)을 집에서 만들기 위해 상추가 필요했다. 집 근처 농장의 비닐하우스 '준식이네'에서 3천원어치 상추를 샀는데,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많았다. 애초에 3천원 어치를 기본으로 파는 집인 데다가 상추 농사 끝물이라 그런지 포기째 뽑아놓은 상추들을 뭉터기로 아주머니께서 넣어주셨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추떡에 들어가는 상추의 양은 많지 않았다. 이럴 거면 생협에서 천원어치만 사올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정도로 그득한 상추들은 매끼니마다 우리의 상에 올라왔다.
그러나 애를 써서 상추를 마구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날 하우스 메이트가 말했다.
"고기라도 구워먹어야 없어질텐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왜 꼭 상추를 다 먹는데 고기가 필요하냐며, 나는 열혈 채식주의자의 심정으로 버럭했다. 하지만 줄어들지 않는 상추를 보며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마침내...... 본가에서 주말을 보내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던 어느 월요일 오전 본가의 동네 생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플라스틱 비닐에 잘 포장된 생고기들. 목살, 삼겹살, 뒷다리살, 앞다리살 종류별로 놓여진 것들을 고민하다가 할인 중인 '통삼겹'을 골랐다. 에어프라이어에 통삼겹을 구우면 그렇게 맛있다는 어느 글을 온라인에서 훑어지나가다 본 것이 기억났다.

다음날 우리는 고기를 구웠다. 집에서 왕복 5KM쯤 떨어진 도서관에 왔다갔다 하느라 배고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에어프라이어는 생략하고, 나무 도마에 통삼겹을 놓고 썰어서, 구웠다. 급하게 안친 가마솥 쌀밥과 삼겹살, 된장과 고추장을 대강 섞은 쌈장, 각자 본가에서 가져온 김장김치를 놓고 먹고 있노라니..... 맛있었다. 한 10개월만에 먹은 삼겹살이었다.

우리가 이 집에서 고기를 구워서 먹다니.........
평소 우리의 식단은 꾸러미나 하우스메이트의 주말농장에서 가지고 온 야채, 시장과 생협에서 산 구황작물 등으로 꾸려진 채식 식단이었다. 채식을 굳이 결심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진 먹지 말자고 결정한 대단한 채식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계란도 먹고 생선도 잘만 먹는다. 그래도 둘이 밖을 떠돌아다니며 데이트하던 시절부터 고깃집에 간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앵간하면 채식을 지향하는 쪽으로 지내왔다. 대형자본을 극혐하면서도 한때 스타벅스에 드나든건 '두유'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고기를 구워먹었다. 물론, 이 한번의 사건을 통해서 줄창 구워먹진 않을테다. 그러나 이렇게 쌈채소가 많아진다거나.... 가끔 유혹에 시달린다면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을테다. 그나마 무항생제와 조금은 더 나은 사육환경이 보장된 생협을 통해 구매했다지만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 보았듯이 거세되는 숫퇘지와 자식과 떨어져야 하는 암퇘지는 다를바 없다.
어차피 둘다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지 않는다해도 이따금씩 생선을 구워먹기도 하고(3개월 살면서 여태 두번 구워먹어봄..) 계란도 먹고 두부도 먹고, 본가에 갔을때 먹기도 하고 사람들과 만나다보면 불가피하게 먹기도 한다. 그러니, 상추가 많으므로 고기를 구워먹자! 라는 생각은 한번으로 족해야 할것이다.
* 설거지를 하면서 느꼈다. 고기먹지말자. 생협 고체비누와 베이킹소다, 삼베수세미로만 설거지하는 우리집에서 이토록 기름기 많은걸 닦자니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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