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허송세월
멧돼지와의 조우 본문
오늘 오후 다섯시 반. 멧돼지를 보았다. 한 10미터 거리.
집에서 나와 50보만 걸어가면 북한산 둘레길 밑 수리공원이 있고, 하루에도 두세번씩 거길 지나고 그 곳에서 운동해온지 세 달째. 운동하며 걱정했던 두가지가 있었다. 남성 범죄자와 멧돼지. 멧돼지의 경우 정말로 마주칠 수 있다는 염려가 들었다. 몇주 전 쯤 처음으로 밤 10시가 넘어서 늦게 공원에 운동을 하러 나갔는데 아무도 없는 와중에 산에서 내려온 걸로 보이는 대형견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재빨리 시선을 피해 내 갈길 가니 멈칫했던 개 역시 제 갈길을 갔고 다시는 밤 9시 이후 공원 쪽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아직 어둠이 다내려앉지도 않은 오후 다섯시 반에 스트레칭 기구에서 한적하게 다리나 휘저으며 노래를 듣던 와중 이었다. 공원에서도 위쪽에 자리한지라 아래가 다 내려다보이는 자리.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형체가 있었다. 공중에서 휘적거리던 다리가 서서히 멎고, 입을 떡하니 벌리고 한 3초 쯤 저게...설마? 라고 생각하다가 5초쯤 고민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멧돼지살상, 살처분, 동물해방 어쩌고저쩌고 보았던 지면과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났다. 신고하면 와서 쏘고 얘가 죽는거 아닌가? 그러다가 아래 쪽에서 할아버지와 정답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아이가 생각나 번뜩 112를 누르고 신고했다. 신고가 연결된지도 모른채, 멧돼지가 이동을 하길래 냅다 "여기 멧돼지 있어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뭐? 멧돼지? 멧돼지있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결된 신고 전화에 위치를 이야기하고 그다음은 내가 문제였다. 위로는 갈데가 없고 섣불리 좌우로 이동할 수도 없고, 정말....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대로 어쩔 수 없이 스트레칭 기구위에 낑낑대며 올라섰다.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지 경찰은 2-3분 여만에 왔는데 아직 내 시야에 있는 멧돼지와 경찰차 사이에서 순간 경찰이 나를 못보고 쏘는건 아닌지 싶었다. 하필 스트레칭 기구 쪽에 있는 가로등이 엊그제부터 고장나있던 상태라 (이것도 구청에다가 전화했음..) 내가 진짜 안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멧돼지는 점점 움직이더니 산쪽으로 향해 사라졌다.
112에 신고했는데 119로도 전화가 와서, 신고가 접수되었다며 멧돼지가 있냐고 이것저것 묻길래 사라졌다고 하니, 그러면 죄송한데 잡을 수가 없어서 가지 않아도 되겠냐해서 당연히 오시지 말라고 했다. 정말, 멧돼지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가 불러놓고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일부러 공원 위쪽에 있는 둘레길 공용 화장실을 찾아가는 하우스 메이트는 여태 개도, 멧돼지도 본적이 없다. 평범한 시간대에 가서 오래 있는 난 다봤다. 정말....남은건 남성 범죄자일까? 그것만은 안봤으면. 하여간 북한산 밑에 산다는 것 대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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